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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 : BC 7,000년 경 - BC 1,000년 경
    • 지역 :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 키워드 : 기원.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노아, 역사

    류가 언제부터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는지는 기록상으로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인류가 남긴 유적들을 살펴보면 와인은 선사시대부터 존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자들이 고대 유적에서 발견한 바에 의하면 BC 7,000년 경 터키, 아르메니아, 이란 사이에 위치한 코카서스 남부지역에서 최초로 포도를 재배한 흔적이 있다. 우연하게도 이곳은 성서에서 노아가 홍수가 끝난 뒤 정착하여 포도를 심었다는 아라라트(Ararat) 산 근처이기도 하다. 성서는 노아가 배에서 나오자마자 맨 먼저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수확한 다음 술을 만들어 마시고 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BC 4,000년 경에 와인을 담그는데 사용되었던 항아리의 마개로 추측되는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이란에서는 BC 3,500년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용기 안에 와인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성서 이외에 다른 기록으로는 수메르(Sumer)왕 길가메시(Gilgamesh)의 서사시가 있다. 이 서사시 역시 성서처럼 홍수와 와인의 기록이 있다. 프랑스 작가 마겔론 투생 사마(Maguelonne Toussaint Samat)는 『음식물의 자연 풍속사(Histoire Naturelle et Morale de La Nourriture)』라는 저서에서 성서의 노아격인 수메르인 우타 나피스틴(Outa Napisthin)이 배를 만드는 데 동원된 일꾼에게 와인을 제공했다고 기술했다.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에서 4,000년 대 중엽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농경생활을 위해 한 곳에 정착했다. 이 시기에 포도 재배도 소아시아를 거쳐 이집트까지 전파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벽화와 앗시리아 유적의 상형문자를 보면 기원전 약 3,500년 경에 당시의 사람들이 와인을 마신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는 와인이 산업 형태를 이루어 세금을 부과했었고, 용기를 밀봉하고 서늘한 곳에 저장하는 등의 제조법도 발전하였다.
    중국 고전에 의하면 포도나무는 BC 3,000년 경에 실크로드를 통하여 카스피해로부터 중국으로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누가 가장 먼저 와인을 만들었을까? 첫 번째 포도원은 어디였을까? 해답 없는 수많은 질문이 생긴다. 와인은 9,000여년 전부터 서구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계속해서 문화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첫 번째 포도원

    인간이 정착 생활을 하면서 야생으로 자란 포도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양조가 일어났다. 의도적으로 양조를 위해 포도를 재배하게 된 것은 한 걸음 큰 진보였다. 고고학자들은 인간이 거주하던 지역에서 발견된 포도씨가 야생 포도의 것인지 혹은 재배된 포도의 것인지 밝혀낼 수 있다.

    재배된 포도나무의 씨앗이 이란 북부에서 발견됐고, 이 씨앗이 9,000년 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인간은 지구 어디엔가 최초의 포도나무를 심은 것이다. 이 지역은 포도 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지형을 가졌기 때문에, 이전에 이미 야생 포도가 자랐던 곳이다.

    와인, 문명의 중요한 요소. 와인의 역사 초기에서 중요한 점은 고대 바빌로니아인, 이집트인, 그리스인 그리고 로마인들은 점점 더 그들 삶의 큰 자리를 와인에 할애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와 특히 종교적 혹은 관례적인 사용으로, 와인은 인간 문명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중국도 이미 와인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적으로 활용하지는 않았다. 포도의 재배는 페르시아와 인도의 도시들 주변까지 다다랐지만, 깊은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다. 비록 세련된 문명과 야생 포도가 있었지만, 콜럼버스 이전의 미국에서는 와인이 발견되지 않는다.

    고대 바빌론 사람들은 이런 시적 표현을 불러일으켰다.
    인류 역사 최초의 상상 작품인 『길마메시 서사시(l'Epopee de Gilgamech)』(기원전 18세기)에 적힌 표현,
    "마술의 포도원은 소중한 돌로 만들어졌다."

    디오니소스, 바커스와 초기 기독교도들의 와인

    그리스. 그리스 기독교의 관행적인 포도주 사용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의식에서 유래했다. 기독교 의식에서 포도주의 사용은 유대교와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만, 그리스와 로마의 포도주의 신인 디오니소스와 바커스에게 하는 종교 의식에서 가장 강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와인을 현재의 터키인 소아시아에서 그리스로 가지고 왔다.

    제우스의 아들인 디오니소스는, 한 번은 인간으로 그리고 한 번은 신으로 총 두 번 태어난다(신화는 우리 인간들에게 상당히 난해하다!). 제우스의 여인인 세멜레가 인간 디오니소스의 어머니이다. 그 자신이 포도나무였고, 포도주는 그의 피였다.

    디오니소스를 표현한 그리스 도자기

     

    로마 제국.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신에 그리스의 신들을 영입시켰다. 이렇게 디오니소스는 바커스가 되었는데, 이 호칭은 소아시아의 리디아 지역 도시들에서 불리던 이름이다. 바커스는 포도주의 신에서 구세주가 되었다. 그에 대한 숭배가 여성들, 노예들 그리고 빈곤자들 사이에서 퍼져나가자 황제들은 그것을 금지시키려고 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기독교의 발달은 로마 제국과 분리할 수 없는데, 기독교 초기에는 바커스 신앙의 여러 상징과 의식을 반복하면서 바커스교의 신도들을 끌었다. 성찬의 의미는 단지 몇 줄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주제이다.

    기독교인들의 모임에서 종교적 의미를 갖는 와인은 성직자의 입회만큼이나 꼭 필요한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와인은 종교적 실천에서 필수적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쇠락 이후 야만족의 침략 기간 동안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북유럽의 정복

    와인은 지중해식 라이프 스타일과 연결되어 있었다. 알프스 북쪽 지역은 흉폭한 침입자들로 인해 포도 재배와 같은 정착민들의 경제 활동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와인을 필요로 하고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교회만이 오로지 포도 재배업을 이어나갔다. 유럽 대륙이 이 어려운 시기를 빠져나올 때, 포도원은 수도원과 대성당 주변에 늘 있었다.

    수도사와 와인. 수도사들은 포도주 제조에 만족하지 않았다. 필사에 능한 그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기술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전력하면서 양조술을 발전시켜 나갔다.

    『파리 사용 시간에 관한 책』의 삽화가 보여주는 포두 수확, 압착 및 보관

    중세 시대 부르고뉴의 시토 수도사들은 포도나무의 크기를 실험하고 가장 잘 익은 포도주를 생산하는 포도밭을 선택하면서, 최고의 포도나무를 선별하고 코트 도르(Cote d’Or)의 토양과 기후를 연구한 첫 번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도둑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가장 좋은 포도밭들을 벽으로 에워쌌다. 현재 남아 있는 돌담들이 이 사실을 증명한다.

    오늘날 독일에서 가장 명성 있는 양조용 포도 재배지역인 라인가우(Rheingau)의 클로스터 에버바흐(Kloster Eberbach)의 시토 수도사들도 동일한 작업을 했다. 이러한 모든 노력들은 단지 미사에 사용될 와인을 생산하기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숙박 및 접객업소와 개인들에게 판매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수도사들은 중세 와인 거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유용한 정보

    중세시대의 사람들에게 와인이나 맥주는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

    도시들의 상수도는 깨끗하지 않았고, 종종 위험하기까지 했다. 살균제로서, 당시의 와인은 기초 의약품 가운데 하나였다. 사람들은 물이 정수기 물처럼 깨끗하게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음용수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물에 와인을 섞었다고 한다. 도시에서 와인을 섞지 않은 채로 순수하게 물만 마시는 경우는 드물었다. 영국인 석학 앤드류 부르드(Andrew Boorde)는 1542년에 이렇게 적었다.

    "(와인 · 맥주를 섞지 않은) 순수한 물은 영국인들의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이런 무역의 르네상스로 인해 거대한 양의 와인이 시장에 나타났다. 수백 척의 배가 런던이나 한자동맹 도시들의 항구로 떠났다. 하천들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상업 운송로가 되었다. 와인으로 가득 찬 오크통은 무겁고 거추장스러워서 대개 배로 옮기는 것이 유일한 답이었다.

    무역

    다시 삶이 평화로워지자 포도밭의 면적은 늘어갔고, 무역이 재개되었다. 와인은 교환 가치로서의 역할을 단 한 번도 잃어본 적이 없다.

    중세 초기인 5세기에서 10세기까지, 해적이 우글거리던 서구의 바다에서, 보르도나 라인강 하구로부터 영국, 아일랜드 혹은 더 북쪽 지역으로 가는 상선들이 은밀하게 출항했다. 소수 야만족의 우두머리는 축제에 와인을 제공할 책임이 있었다. 가장 멀리 떨어진 은둔지역에서도 늘 신도들의 모임에는 와인이 필요했다.

    영국인은 보르도 와인을 좋아한다.

    다량의 와인이 유통되었다. 14세기에 영국으로 수출된 보르도 와인의 양은 상당해서 와인의 연평균 수출량은 1979년이 되어서야 그 기록이 깨졌다. 영국의 왕 에드워드 2세는 1308년 거행된 프랑스 공주 이자벨과의 결혼식을 위해 대략 백만 병 정도의 와인을 보르도에 주문했다. 거의 3세기가 지난 엘리자베스 1세 통치 기간에 인구 610만 명의 영국은 매년 4천만 병의 와인을 마셨다.

    고대의 세밀화 속의 와인

    중세시대 여러 서적에 삽입된 삽화들은 포도원의 작업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미 당대에 와인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포도나무의 가지치기, Livre d’heures de Charles d’Angoulême(15세기)
    포도 수확과 착즙, Breviari d’amor(14세기)
    9월의 작업, le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15세기)
    3월의 포도나무 가지치기, Missel romain à l’usage de Tours (14세기 초)
    상인들의 일상(14세기)
    위생 협정(15세기)
    와인을 맛보는 수도사, le Livre de la Santé(13세기)
    카나의 결혼식, Très Belles Heures de Notre-Dame(15세기)

    인류가 최초로 포도를 활용한 시기는 크로마뇽인들이 라스코(Lascaux)동굴 벽화에 그린 포도 그림을 통해 3~4만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포도 열매를 다 먹지 못하여 남은 포도를 초기에는 건포도 형태로 먹다가 추후 음료 형태로, 그리고 껍질의 이스트(Yeast)에 의해 발효된 형태로 먹기 시작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포도씨가 모여 있는 유물을 통해 고고학자들은 BC 9000년 경 신석기 시대부터 포도를 활용한 인류 최초의 술을 먹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와인 역사는 두 문명이 발달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전되기 시작 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관련한 유적으로는 BC 8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유역의 그루지아(Georgia)지역에서 발견된 압착기, BC 7500년경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와인 저장실, BC 4000~3500년에 사용 된 와인을 담은 항아리, BC 3500년경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이집트의 포도재배, 와인 제조법이 새겨진 유물 등이 있다. 그 후 BC 2000년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에 와인의 상거래에 대한 내용이 있으며 이것이 와인에 관련된 최초의 기술이다. 인류는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에게 와인을 바쳤고, 의식, 축제, 상거래 등에서 중요한 매체로 활용되었다. 이집트인들은 오시리스(Osiris)신에게, 그리스인들은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Dionysus)에게 감사의 뜻으로 와인을 바쳤으며 성경에도 대홍수가 끝나고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와인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지중해 연안의 온난한 기후에서 최대의 자연환경으로 자라던 포도의 경작은 그리스인들에 의해 발전되었고 로마시대에 이르러 더욱 부흥기를 맞는다. 로마가 식민지로 지배했던 곳은 유럽전역, 영국 일부, 지중해 연안의 아프리카로 로마 군인에게 와인이 필요하였고, 이를 위하여 프랑스의 론, 마르세이유, 보르도, 부르고뉴, 독일의 라인강 유역에 포도밭을 구축하였으며 이것이 현재 유럽의 포도주 생산 기반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국의 멸망 후 중세시대에 이르러 와인 기술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보급되었다. 특히 부르고뉴 지역의 시토(Citeaux) 수도원 수사들에 의해 현대적 형태의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 기술이 성립되었으며 샴페인과 코르크마개를 개발한 동 페리뇽(Don Perignon)은 상퍄뉴 지방의 오트빌에 있는 수도원의 와인 양조담당 수사였다. 이처럼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종교용과 의료용으로 와인을 공급하던 것이 점차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등으로 퍼져 나갔다.

    1152년 프랑스 공국의 아키텐 공주가 훗날 헨리2세가 되는 앙주 지방의 백작과 결혼하면서 보르도와 서남부 일대의 영토가 영국의 속령이 되고,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백년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보르도를 소유하지 못하게 된 영국은 그 대체시장을 찾아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눈을 돌렸고 이 나라의 와인이 발달하는 계기가 된다. 프랑스 혁명 이후 수도원과 영주가 소유하고 있던 포도밭이 여러 소유주들에게 나누어지고 보르도 지역은 신흥금융자본에 의해 포도경작지가 대규모로 재통합 된다.

    이후 1800년부터 20년간 포도나무에 필록세라(Phylloxera)라는 전염병이 돌아 포도원이 황폐해지나 미국의 포도나무를 접붙여 해결된다. 이후 프랑스는 와인의 품질보장을 위해 원산지 통제명칭 ‘AOC’ 제도를 도입한다.

    1874년에는 355개의 포도 품종이 구분되어 명명되었고 19C 말부터 신세계 와인(미국, 칠레, 호주, 뉴질랜드)의 눈부신 활약을 바탕으로 와인산업의 발달되고 생산량도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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